(칼럼)-한은 총재의 명쾌한 가이드라인과 하반기 통화정책 분수령 - Reuters
부임후 이제 막 석 달을 넘긴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를 전임 이주열 총재와 비교하기엔 아직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창용 총재가 취임 초기에 보여주는 화법은 분명 이주열 전 총재와 대비되는 부분이 있다.
지나친 단순화일 수도 있지만 이주열 전 총재의 경우 기자간담회 등에서 직설적인 질문을 받을 때 여러 주장을 동시에 언급하며 곤란한 답변을 피해가곤 했다.
'누구는 이렇게 생각하고 누구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식이다. 그렇지 않을 땐 '이런저런 지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이라며 답변의 말미에 살짝 힌트를 흘리곤 했다. 발언마다 항상 해석의 여지를 남긴 이 총재는 기자들이 야속하게 느낄 정도로 쉽게 기사 헤드라인을 잘 내주지 않았다.
말의 서두에 중심 내용을 배치하는 화법을 선보이는 이창용 총재는 그런 의미에서 기자들의 사랑을 받을 만하다.
일단 자신의 입장을 먼저 밝힌 후 논거가 되는 데이터와 반대되는 의견을 두루 언급하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취임 초반 '원화 절하폭 심각하지 않다'거나 '빅스텝 가능성 배제할 수 없다' 등 통화, 외환정책 방향을 노골적으로 시사하는 듯한 발언이 맥락 없이 보도되며 시장에 논란을 촉발하기도 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수석이코노미스트, 국제통화기금(IMF)의 아시아·태평양 담당 국장으로 지난 10여년을 보내며 조사, 전망을 주로 담당했던 경험이 이같은 두괄식 화법으로 이어진 것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지표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경제전망을 할 때는 강력한 논거 제시와 함께 분명한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대외적인 비판을 떠나 내부 평가라는 허들조차 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 물가 피크아웃과 통화정책 휴지기 힌트
어쨌든 이 총재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내놓은 답변의 서두만 꿰어도 보배같은 그림이 그려진다.
이번엔 기대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기준금리를 50bp 인상했지만 앞으로는 물가가 예상보다 더 급등하거나 경기가 급랭하지 않으면 25bp씩 점진적으로 인상한다는 것, 지금 기준금리는 중립금리의 하단으로 보이며 앞으로 한 두 번 더 인상하다고 해서 긴축은 아니라고 본다는 것, 물가 상승률이 6%를 넘는 상황에선 경기보다 물가에 초점을 맞추는 게 거시경제 운용에 좋다는 것, 국??물가는 3분기 말~4분기 초에 정점을 찍고 하락하리라는 발언이 한 묶음이다.
일단 시장이 외통수에 걸리는 시나리오의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졌다. 이달에 금통위가 빅스텝을 단행했는데 7월 물가가 6월 수준 이상으로 나오면서 금통위 의사와 관계없이 시장이 '또 한 번 빅스텝' 가능성을 반영할 가능성은 이 총재의 점진적 금리인상 발언으로 희석됐다.
7월 소비자물가가 6월 물가를 상회할 가능성을 감안하면 8월 금통위 회의에선 기준금리가 또 한 번 25bp 인상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중요한 건 9월에 금통위 회의가 열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미국 물가의 피크아웃(peak-out)은 한국보다 빠를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예상이다. 6월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이 5월(8.6%)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라면 연방준비제도가 6월에 이어 이달에도 자이언트 스텝을 밟을 가능성이 있지만 충격요법이 이어질수록 경제주체들의 비명도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9월 FOMC 회의때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폭이 25bp까지 줄어든다면 금통위가 10월 회의때 추가로 기준금리를 인상하는 문제를 놓고 조금 더 고민할 가능성은 있다.
다만 이는 한은 전망대로 국내 소비자물가가 9월 또는 10월경 피크아웃하기 위한 대내외 분위기가 조성됐을 때 이야기긴 하다.
▲내년 1%대 성장률 전망, 통화정책 분수령 될 수도
올해 마지막 수정 경제전망이 나오는 11월 금통위 회의때는 향후 통화정책의 큰 방향을 놓고 승부가 펼쳐질 가능성도 생겼다. 이 역시 이 총재의 발언 안에 힌트가 숨어 있다.
이 총재는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2% 중반으로 내년 성장률을 2%에 근접한 수준으로 이야기하면서 성장률이 2%를 하회할 경우 정책 변경의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다.
현재 추이를 봤을 때 올해 성장률이 2%를 하회하기 위해선 하반기 엄청난 부진이 뒷받침돼야 한다. 하지만 내년 성장률 1%대 전망은 향후 글로벌 경기 부진 전망이 심화되면 주요 전제치의 소폭 조정만으로도 가능해진 게 사실이다.
통화정책 사이클의 전환을 의미하는 단서라는 측면에서 1%대 성장률 전망치 발표는 시장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재료가 될 수 있다.
현재 미국이나 한국이나 관건은 기준금리가 얼마나 빨리 올라가느냐가 아니다. 미국 시장은 현재 최종 정책금리 수준을 3.3% 정도로 반영하고 있다. 한국시장의 컨센서스는 3~3.25% 정도인 듯 한데 앞으로 좀 더 내려갈 듯하다.
내?瘦沮?높은 수준을 유지할 물가와 기준금리 인상 추이를 감안할 때 당장 시장금리 레인지 하단을 계속 낮추기 쉽지 않지만 기준금리 인상 사이클이 마무리된 후 빠르게 인하 사이클이 열리는 시나리오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국에서도 내년 2분기 금리인하콜이 나오는 게 최근 채권 랠리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만약 한은이 연말에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1%대로 하향 조정하면 국내시장도 단순히 추가 금리인상 기대감의 소멸을 넘어 내년 금리인하를 선반영하기 시작할 수 있다.
물론 다른 금통위원들이 이 총재와 생각을 달리 할 수도 있고 물가나 경기지표도 예상과 달리 흘러갈 수도 있다.
다만 이 총재가 지난 5월 던진 빅스텝 언급이 현재화된 지금, 금통위 기자간담회에서 명시적으로 제시된 가이드라인을 무시할 채권시장 참가자들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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