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한은 총재의 포워드 가이던스 딜레마 - Reuters
이 칼럼은 저자의 개인 견해로 로이터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1990년대 초반 멕시코 경제는 경제 펀더멘털 대비 과도하게 강한 페소화 가치 때문에 2% 초반의 미미한 성장세를 보였다. 이것도 그나마 1980년대 기록했던 1%대 성장률보다는 개선된 수치였다. 멕시코 정부는 1994년에야 비로소 페소화의 평가절하를 단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오히려 멕시코 경제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가 훼손되며 자본유출이 가속화된다.
멕시코에서 비롯된 소위 '테킬라 위기'는 남미 대륙 반대편에 있던 아르헨티나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멕시코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기가 안정적이었던 아르헨티나였지만 일단 페소화에 대한 투매가 시작되자 광풍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했다.
일부 외국인 투자자들이 먼저 달러 대출의 롤오버를 제한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위기감을 느낀 경제 주체들이 달러 확보 경쟁에 나서면서 점진적으로 달러 유동성이 말라갔다. 아르헨티나는 결국 세계은행을 통한 구제를 받아야 했고 경기는 심각한 불황으로 빠져들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외환 당국에서 근무했던 이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작위적인 몇몇 외신 기사가 한국 경제의 문제를 과도하게 부각시키면서 정작 위기의 당사자였던 국가들보다 우리가 더 심각한 달러 유동성 위기를 겪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시장에 달러 유동성 경색이 나타난 2008년 당시 국내 은행의 꼬인 스왑 포지션이 위기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기본적으로 기축통화를 사용하지 않는 국가들은 언제든, 어떤 이유로든 위기의 전염 가능성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 이창용 한은 총재의 포워드 가이던스 실험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포워드 가이던스 때문이다.
이 총재는 코로나 위기 이후 미국 연방준비제도와 유럽중앙은행(ECB)이 경직된 포워드 가이던스 때문에 대외 환경 변화 대처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문제의식 아래 조건부 포워드 가이던스를 실험 중이다.
이 총재가 지난 잭슨 홀 심포지엄에서 밝힌 내용에 따르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장기금리를 낮추고 경기를 안정화시키는 데 효과를 보였던 비전통적 포워드 가이던스는 미래의 정책 경로를 정성적인 내용이나 특정 시기, 임계치에 기반해 밝히는 것이??
이같은 비전통적 통화정책이 성공적이려면 중앙은행이 발표한 정책 경로의 이행이 실현 가능하다는 신뢰가 필요하다. 문제는 시장의 신뢰를 획득하고도 정책 경로의 이행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을 경우 투기 공격이라는 부작용, 과도한 통화 절하 문제 등에 직면하게 된다고 이 총재는 지적했다.
비전통적 통화정책의 대안으로 이 총재가 제시한 게 시나리오를 상정한 전통적 포워드 가이던스(조건부 포워드 가이던스)다.
통화당국이 경기 전망의 불확실성을 인정하면서 포워드 가이던스를 할 경우 경기 국면 전환 시점에 더욱 유연한 정책 대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총재는 지난 7월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50bp 인상할 때 “국내 물가 흐름이 전망 경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기준금리를 당분간 25bp씩 점진적으로 인상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조건부 포워드 가이던스를 준 것을 예로 들며 향후 신흥국들이 비전통적 통화정책에 의지하기보다는 시나리오 기반의 전통적 포워드 가이던스를 정교하게 갖추는 데 노력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 조건부 포워드 가이던스의 비용과 편익
올해부터 한은의 지휘봉을 잡은 이 총재의 직설 화법은 전임 이주열 총재의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식 커뮤니케이션과 대비되며 시장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왔다.
하지만 이 총재의 투명한 소통과 디테일이 살아 있는 정책 경로 설명이 가능하려면 결국 전망에 대한 특권화가 불가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통화당국자의 모호한 커뮤니케이션은 경제 데이터에 기본적으로 소음이 많다는 점을 인정하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마치 거대한 선박의 방향을 조정하는 작업처럼 매번 업데이트되는 내용을 수시로 점검하며 조금씩 정책을 수정해 나가는 식이다. 비록 '언더슈팅'의 위험은 있지만 나중에 심각하게 왜곡된 것으로 판명 날 수 있는 특정 지표에 과도하게 의존할 위험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인플레이션 지속성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는 시점에 조건부 포워드 가이던스 접근이 더 공격적인 정책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높은 기대인플레이션 고착화에 대한 통화 당국자들의 뿌리 깊은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결국 구조적 부분에서 비롯된다.
경기 전환 국면에서 환율 변동성이 확대될 경우 신흥국과 소규모 개방 경제 국가들이 겪어야 할 어쩌면 불합리할 수 있는 처분의 문제다. 소위 선진국들의 금리가 인상되며 내외 금리차가 축소되는 시점에 글로벌 경기가 둔화할 경우의 문제다.
경쟁적인 금리 인상이 선진국, 신흥국 가리지 않고 심각한 경기침체 가능성을 키우는 가운데 일부 국가에서 신용경색 이벤트가 발생하며 다시 달러 대비 급격한 통화 가치 절하라는 악순환의 고리가 가속화되는 경우다. 우리 경제 펀더멘털은 괜찮다며 아무리 하소연해도 소용없는 경우다.
▲환율 전면 부상시 노이즈되는 '포워드 가이던스'
이창용 총재는 지난 22일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마치고 기자들과 만나 "포워드 가이던스가 전제와 관계없이 예고나 선언한 것은 아니란 것을 알 텐데 가장 큰 전제조건이었던 주요국, 특히 미국 연준의 최종 금리에 대한 시장 기대가 한 달 새 바뀌었다"고 말했다.
시장에선 이 총재가 사실상 10월 빅 스텝(50bp 금리 인상)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라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포워드 가이던스의 전제였던 국내 물가와 성장률 전망에 극적인 발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환율 상승에 따른 물가 전이 효과가 있겠지만 유가 하락으로 상당 부분 상쇄될 것으로 예상된다. 물가 정점이 임박했다는 한은과 정부의 인식에는 변화가 없고 성장률도 당초 예상 경로에서 벗어났다는 신호는 보이지 않는다.
달러/원 환율이 1400원을 넘어 1500원까지 갈 수 있다는 인식 자체가 시장 참가자들의 달러 매입 심리를 자극하고 있는 상황에 통화당국의 선택지가 제한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지금 달러를 오퍼하는 곳들은 달러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위기 트라우마'에 빠져 있다. 비드를 해야 할 곳들은 여유롭게 기다리다가 오히려 더 강하게 오퍼해 손절을 유도하려 하다. 변동성이 심리를 누르고 심리가 변동성을 키우는 장세에서 자기실현적 위기의 단추가 눌러지는 걸 한은은 가장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건 모든 신흥국과 소규모 개방 경제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부분이다.
▲한국, 신흥국과 사정 다르지만..신뢰 확보가 관건
물론 한국의 사정은 다른 신흥국과 다르다.
지금은 엔화, 유로화, 위안화가 동시에 흔들리며 무차별적인 달러 강세가 나타나는 흐름이라 원화라고 딱히 용빼는 재주를 부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3년 테이퍼 탠트럼 당시 신흥국 통화 가치가 급락했을 때 원화 가치는 오히려 절상됐고, 2016년 중국발 경제위기 우려와 위안화 가치 급락 때도 원화는 신흥국 통화들과 다른 결로 움직였다. 기축통화국만큼은 아니지만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안전 자산'의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펀더멘털이 취약한 신흥국들은 다른 이야기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논리로 움직인다.
폭풍이 몰려왔을 때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점도 큰 차이다.
2008년 글로벌 위기 당시 연준에서 국제금융 담당 부서를 이끌던 네이던 시츠가 정리한 통화스왑 편입 조건은 유명하다. 그에 따르면 연준의 통화스왑 안전망에 포함되는 국가는 경제 및 금융 규모가 상당히 커서 미국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국가, 거시건전성 정책을 통해 잘 관리되고 있어 미국의 지원을 정당화할 수 있는 국가, 달러화 조달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가뿐이다.
통화 가치 절하라는 파고 앞에서 신흥국 중앙은행은 포워드 가이던스에 큰 의미를 두기 어려워진다. 신흥국의 통화정책이 연준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인정한다면 국내 경제 전망을 특권화해 포워드 가이던스를 내놓는 데 어려움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선진국과 신흥국 경계선에 있는 한국 경제의 위상 제고된 위상을 감안하면 이 총재의 포워드 가이던스 실험은 아마도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환율이 '알파와 오메가'가 돼버린 시점에 당분간 큰 의미를 갖기 어려울 듯하다.
지금과 같은 시점엔 중앙은행이 다양한 변수 변화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모습이 오히려 투자자들을 더 불안하게 만든다. 이 총재의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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