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한은 총재의 '포워드 가이던스' 딜레마 Ⅱ - Reuters
이 칼럼은 저자의 개인 견해로 로이터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언론에 자주 등장했던 용어는 '서든 스탑(sudden stop)'이었다. 예상치 못한 자본 유입 중단 이후 대규모 자본 유출이 나타나는 현상을 지칭했는데, 1997년 외환위기의 상흔이 남아 있던 한국 금융시장에서는 어떤 용어보다 중요하게 다뤄졌다.
서든 스탑은 실질환율의 대폭 절하와 외환보유액의 급격한 감소 국면에서 통상적으로 유사한 특성을 가진 국가에 동시다발적으로 전염되는 경향을 보였다. 급격한 통화 가치 절하를 막는 과정에서 나타난 유동성 공급 축소가 경기침체의 폭을 키우며 자본 유출입을 가속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펀더멘털이 견조하고 외환보유액이 충분히 확보된 국가에서도 투자자들의 자기실현적 기대만으로 자본 흐름이 극적으로 역전되는 경우가 나타났다. 1992년 유럽환율메커니즘(ERM) 사태가 그 극명한 예다. 투자자들의 자기실현적 기대가 문제가 되는 국면에선 정책 당국의 신뢰도가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최근 흐름을 보면 시장의 약한 고리에 대한 '안전성 테스트'가 연달아 진행되는 상황이다.
영국의 경우 브렉시트 발 불신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정책 당국자의 미숙한 커뮤니케이션이 위기에 불을 질렀다. 크레디트스위스(CS)의 경우 지난해 파산한 영국의 그린실캐피털과 한국계 미국인 투자자 빌 황의 아케고스캐피털에 투자했다가 천문학적인 손실을 내면서 이미 평판이 크게 훼손된 상태였다. 이미 투자자들의 신뢰를 훼손한 적이 있는 국가나 기관에 대한 투자자들의 냉정한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국면이라는 말이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이달 회의에서 시장 기대 수준보다 완화적인 통화정책 경로를 제시했을 때 환율로 수렴되는 시장의 응징 리스크를 현재 정책 당국의 그 누구도 감당하기 어렵다고 보는 이유다.
▲올라갈 환율은 올라간다(?)
하지만, 1992년 ERM 사태의 교훈을 다른 차원에서 해석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당시 인플레이션을 잡으려는 독일의 고금리 정책에 많은 유럽 국가의 통화 가치가 급락했고 파운드화도 그 파고를 피해가지 못했다.
영국 정부가 헤지펀드와의 전면전을 선포하며 시장 개입을 단행했지만, 파운드화가 폭락을 거듭하자 결국 백기를 들었고 전격적으로 ERM 탈퇴를 발표했다. 중요한 건 ?뎠?정부가 한발 물러선 후 더 떨어지는 듯했던 파운드화가 급반등했다는 점이다. 펀더멘털이 달라진 것도 없고 외환 보유액이 늘어난 것도 아니었다.
시장은 이미 독일발 고금리 사태의 파장을 최대한 반영해 가고 있었는데 영국 정부라는 마지막 불확실성 요인이 제거되자 가격 하단의 영점이 잡혔고 그제야 관망하고 있던 매수세가 유입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한은 금통위가 이번에 빅 스텝을 하든 안 하든 올라갈 환율이라면 올라간다는 주장은 여기서 나온다.
지금 달러/원 환율의 상승은 한-미 금리차라든가 국내 경제의 펀더멘털, 외환 건전성과는 관계없이 달러화 강세에 따른 위안화, 엔화, 유로화 가치의 영점 조정 과정을 반영할 뿐이라는 것이다. 어디가 됐든 약한 통화 가치를 따라간다는 지적도 있긴 하지만 결국 원화가 갈 데까지 가야 끝날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달러/원 환율이 1400원대까지 올라왔음에도 외화 자금시장에 이렇다 할 경색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다. 2008년보다 더욱 확충된 신흥국 외환보유고 덕에 위기 확산 방지 인프라가 이전보다 촘촘하게 구축돼 있다는 점도 서든 스탑의 위험성을 낮추는 부분이다.
하지만 1200원에서 1300원으로 오르는 것과 1300원에서 1400원으로 자리바꿈하는 게 다르듯, 1400원에서 1500원으로 가는 건 큰 차이다.
달러/원 환율이 1800원까지 갈 수밖에 없는 게 운명처럼 예정돼 있다고 해도 정책 당국의 행보에서 비롯된 불규칙 바운드를 사전에 차단해 시장 변동성을 제어할 필요는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원화 실질실효환율이 다른 통화들과 괴리되는 걸 제어하면서 크게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도록 페이스를 조절하는 게 중요한 시점이다.
▲11월 추가 빅 스텝 관건..페이스 조절 가능한가의 문제
문제는 페이스 조절이 가능한가다. 시장은 이달에 빅 스텝이 이뤄지면 11월 추가 50bp 인상을 반영해나갈 것이다.
국내 부동산 시장에 균열의 조짐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현시점에 두 달 연속 기준금리가 50bp 인상될 경우 후폭풍이 얼마나 클지 예상하기 쉽지 않다. 현재 국내 가계부채 수준과 자산 가치 급락에 따른 부채 상환 러시 가능성을 감안하면 일본식 대차대조표 불황이 닥쳐오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하기도 어렵다.
금통위 입장에선 두 달 연속 빅 스텝 시나리오를 가급적 배제하고 싶어하겠지만 딱히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이 총재가 이번에 어떤 포워드 가이던스를 준다 해도 시장이 곧이곧대로 듣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다.
이 포워드 가이던스라는 게 벌써 석 달째 미묘하게 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7월에 이 총재는 물가 상승률이 6%를 넘는 상황에선 경기보다 물가에 초점을 맞추는 게 거시경제 운용에 좋다는 입장을 밝혔다. 8월엔 향후 국내 경제의 성장 경로가 전망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5%대 물가가 지속된다면 현재의 기조(베이비 스텝)를 유지한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슬그머니 정책 초점을 물가 정점 여부에서 물가 하락 속도로 옮겨놨다.
이번에 이 총재는 연준의 통화정책을 기본 전제로 두고 소비자물가 상승률의 5%대 지속 여부가 향후 통화정책 경로를 결정할 것이라는 식으로 포워드 가이던스를 제시할 것으로 예상된다. 9월 물가상승률(5.6%)이 8월(5.7%)보다 하락하는 등 두 달 연속 하락세가 나타나고 있긴 하지만 절대 상승률이 높고 근원인플레이션 상승세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음을 강조할 전망이다.
하지만 물가상승률이 6%대에서 5%대로 낮아지고 국내 경기 전망이 불투명해지고 있는 시점에 기준금리 인상폭을 25bp에서 50bp를 올리는 건 환율을 빼고 설명할 수 없다.
시장 참가자들 입장에선 물가상승률이 5.6%에서 5.3%, 5.3%에서 5.1%로 이동한다 해도 환율이 1430원에서 1450원, 1450원에서 1490원으로 이동하면 또 빅 스텝 카드가 테이블 위에 올려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이 총재의 포워드 가이던스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조정되다 보니 자기 책임을 지고 운용을 해야 하는 채권 투자자들의 선택도 분명해지고 있다.
통화정책 경로에 대한 전망 컨센서스가 사라지면 결국 모두가 포지션 방어에 급급한 상황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결국 시장 유동성이 마르고 '금리 상단 인식'이라는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게 되면서 악순환의 고리가 반복된다.
이건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가까스로 안정세를 찾는 듯하던 영국 국채금리가 최근 다시 급등세를 보이고 있다. 단기 금리 급등에 레버리지 투자 규모를 키워왔던 연기금 등 시장 참가자들의 매입 여력이 크게 떨어지면서 영란은행(BOE)의 국채 매입 없이는 가격 매칭이 어려운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상황까지 왔다.
미국 국채시장 역시 유동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미국 국채금리가 하루에 10~20bp씩 요동치고 있는 것은 분명 중요 행위자들의 채권 매입 여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다.
이 총재에게 많을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국내 통화정책 결정이 연준 결정의 종속변수가 된 게 한은의 책임도 아니다.
다만 시장 참가자들이 수긍할 수 있는 통화정책 경로를 제시하면서 과도한 긴축이 수급 매칭을 통한 가격 결정이라는 시장의 본질적인 기능을 훼손하지 않올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게 이 총재의 과제다.
통화당국의 인플레이션 안정 의지를 의심할 여지를 줘선 안 되겠지만, 금융 안정 역시 중요한 정책 목표임을 우회적으로라도 강조해 시장 참가자들에게 시간을 벌어줄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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