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SVB 파산에서 레고랜드 사태 겹쳐보는 韓 금융시장..살생부와 심리 그리고 통화정책 - Reuters News
서울, 3월13일 (로이터) 임승규 기자 - 미국 내 자산 규모 16위인 실리콘밸리 은행(Silicon Valley Bank)의 파산 후폭풍이 대내외 금융시장을 강타하고 있다.
미국 당국이 당초 방침을 뒤엎고 전격 긴급 구제에 나서면서 시스템 리스크로 전이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지만, 지난해 레고랜드 사태를 경험했던 국내 시장참가자들은 '더 복잡한 전개'를 예상하며 포지션 전략을 재조정하고 있다.
통화당국의 급격한 금리 인상에 따른 충격 요인이 상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장의 약한 고리가 흔들리면 시장참여자들이 각자도생(各自圖生)식 자구 행위를 통해 위기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불과 몇 개월전 체감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연준의 금리인상에 따른 파장이 결코 일회성으로 마무리되지 않을 가능성을 감안해 채권, 환율, 크레딧 포지션 전략을 세워나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SVB 파산과 레고랜드 사태..'신뢰의 둑' 한 번 무너지면 치명적
지난 주말 미국 FIDC(연방예금보험공사)는 SVB를 폐쇄하기로 결정하고 DNB(산타클라라 예금보험국립은행)을 설립해 SVB의 자산과 예금 업무를 이관받겠다고 발표했다. SVB가 예금 인출에 대응하기 위해 보유 자산을 추가 매각하겠다고 발표한 지 하루도 안 돼 전격적으로 이뤄진 조치다.
벤처캐피털과 스타트업이 주요 고객인 SVB는 팬데믹 기간 불어난 자산과 예금을 안전자산인 미 국채, 정부 보증채권에 대거 투자했다. 하지만 작년부터 시작된 연준의 고강도 긴축으로 채권 가격이 급락하면서 대규모 손실을 입었다.
더구나 SVB의 주요 고객인 스타트업 기업들이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며 예상보다 예금 인출 수요가 높아졌다. SVB는 포트폴리오가 미국 국채와 미국 정부기관이 보증한 자산유동화증권(MBS)에 치중돼 있다 보니 예금 인출 사태에 대응할 유연성이 떨어진 게 문제였다. SVB는 예금 인출에 따른 재원 마련을 위해 보유채권을 매각했는데 이 과정에서 평가손이 확정되며 불안감을 불러일으켰고 이게 뱅크런을 초래했다.
시장 일부에선 이번 사태가 미국 전체 금융시장 규모를 감안할 때 일부분이며 대다수 대형은행들의 건전성을 감안할 때 시스템 리스크로의 전이 가능성을 평가절하하고 있다. 더구나 연준이 기존 결정을 뒤집고 금융 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하기로 하면서 SVB 사태에 따른 파장이 제한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커지는 상황이다.
반면 지난해 레고랜드 사태를 경험한 국내투자자들은 한 번 무너진 신뢰의 둑이 쉽게 회복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시장의 약한 고리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그나마 건전성이 좋은 다른 기관들이 더 급하게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위기의 강도가 급격히 올라갈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강원도가 2050억원 규모 춘천 레고랜드 부동산 PF ABCP(자산담보부기업어음)을 부도 처리할 때도 시장에선 '시스템 리스크로 이어질 만한 사안은 아니다'라며 평가절하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기업들의 유동성 압박 우려가 커지는 시점에 유튜브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각종 루머가 엄청난 속도로 확대 재생산되다 보니 상황이 급격히 악화됐다.
연말을 앞두고 기업들의 대규모 자금인출 가능성이 부각되자 상대적으로 자금사정이 좋았던 시중은행들이 채권 발행을 늘리며 시중자금의 블랙홀이 됐다. 시중은행들이 자금줄을 조이자 상대적으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던 금융회사들의 어려움이 순식간에 드러났고 시장은 패닉으로 치달았다.
▲살생부 돌며 흉흉한 시장..연준 고민 커질 듯
SVB의 파산 이후 시장에선 '다음 타깃이 누구냐'라는 데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당장 뉴욕주에 기반을 둔 시그니처은행이 폐쇄됐고 퍼스트리퍼블릭과 팩웨스트뱅코프 등 부동산이나 암호화폐, 기술 기업 등에 고객층이 집중되거나 미실현 손실이 큰 곳들이 타깃으로 지목되고 있다.
다수의 국내시장참가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당분간 연준의 최대 과제는 무분별한 살생부 유포와 자기실현적 위기 확산을 막는 데 맞춰질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지난해 레고랜드 사태 당시 국내 통화당국처럼 연준 역시 통화긴축이라는 큰 기조를 바꾸진 않으면서 금융 불안 확산 방지에 무게를 두는 정책 믹스를 시도할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는 진단이다.
A국내은행 운용팀장은 "작년 우크라이나 전쟁 때도 금리가 많이 빠졌다가 다시 올라왔는데 그때는 지정학 리스크에 기반하다 보니까 인플레를 유발하는 이벤트였고 금리상승기 초입이었다"며 "지금 금리상승기가 종반에 가까워진 상황이고 부각된 리스크 역시 금리가 높아서 온 리스크다 보니 반응이 다를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시장은 언제나 다음 사냥감을 찾게 마련인데 살생부가 돌면서 하나 둘씩 무너진다고 하면 결코 작은 이슈가 아니다"라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대형은행의 경우 대마(大馬)가 불사(不死)할 수 있도록 강력한 규제 체제가 만들어져왔지만 규제 사각지대에서 핀테크와 암호화폐 기업 등이 얼마나 리스크를 키워왔는지 예단하기 어려운 만큼 연준이 최종금리를 더 높게 더 길게 가져가는 부분에 대해서도 고민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B증권사 채권본부장은 "우리는 지난해 레고랜드 사태를 통해 이런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좀 더 안정적으로 사안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있다"며 "이번 사태가 얼마나 확산될지는 예단하기 어렵지만 결코 일회성 이벤트로 마무리되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향후 연준의 최종금리가 떨어질 가능성에 무게를 둬야 할 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일단 지금 채권 숏은 접고 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본다"며 "완전한 채권 롱을 확신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일단 중립 이상으로 놓고 가야 할 듯하다"고 말했다.
C외국계은행 트레이딩헤드는 "연준이 여기서 금리인상을 멈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속도는 확실히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며 "이런 상황이면 달러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베이시스가 확대되는 쪽으로 봐야 하고 이머징 통화가 좋을 수가 없지만 원화의 경우 수급 이슈와 맞물리고 있어 예상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FTX부터 실버게이트, SBV 등 연준 통화정책의 영향을 받은 문제 사례가 앞으로도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며 "기준금리와 시장금리 역전, 크레딧 스프레드의 확대가 예상되며 베이시스와 채권이 올해 시장을 리드하게 될 듯하다"고 말했다.